2026.08.05

[변호사 칼럼]내 마음에도 독재정치와 민주정치가 있다 - 폭군은 어리석어서 망하지 않는다

1. 현실의 독재정치


우리는 독재가 망하는 이유를 지도자의 어리석음에서 찾는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폭군들은 대체로 영리했다. 권력을 잡을 만큼은 영리했고, 오래 유지할 만큼은 노회했다. 그들이 무너진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틀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재는 두 곳에서 회로를 끊는다. 하나는 위쪽이다. 검열과 공포와 아부가 쌓이면 "이 정책은 실패했습니다"라는 보고가 궁정에 올라오지 못한다. 신하들은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한다. 왕은 현실이 아니라 왕이 원하는 현실의 모형 속에 산다. 다른 하나는 아래쪽이다. 설령 실패를 알게 되더라도, 통치 가설 자체, 즉 집권자를 교체할 장치가 없다. 고칠 정보도 없고, 고칠 방법도 없다.

그래서 독재는 단기적으로 빠르다. 회의도 없고 반대도 없고 절차도 없으니 당연히 빠르다. 그러나 그 속도는 방향이 맞을 때만 유효한 속도다. 방향이 틀리면 빠를수록 더 빨리 절벽에 닿는다. 브레이크가 아니라 핸들이 없는 자동차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현명해서 이기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흔한 논리는 "다수의 지혜"다. 나는 이 논리가 틀렸다고 본다. 다수는 자주 틀린다. 군중은 선동되고 여론은 출렁인다. 민주주의를 다수의 현명함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다수가 어리석어지는 날 옹호할 근거를 잃는다.

칼 포퍼는 훨씬 냉정한 답을 내놓았다. 좋은 정치체제의 기준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쁜 통치자를 피 흘리지 않고 갈아치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선(善)이 아니라 교체 가능성에 있다.

이것을 사고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민주주의란, 틀린 가설을 유혈 없이 폐기할 수 있는 정치다.



정책은 가설이다. 시행은 그 가설의 연역적 전개다. 그 결과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하는 것이 귀납이다. 그리고 선거는, 귀납이 "이 가설은 틀렸다"고 판정했을 때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절차, 즉 가추(假推)다. 민주주의는 느리다. 회의하고, 반대하고, 다투고, 몇 년마다 다시 묻는다. 그 모든 비용은 오류수정의 회로를 살려두기 위해 내는 보험료다.

단기의 비효율을 지불하고 장기의 생존을 산다. 독재는 반대로 한다. 단기의 효율을 챙기고 장기의 파산을 예약한다.


2. 내 마음의 독재정치

가. 내마음에도 독재정치가 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여기까지는 정치 이야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옮겨 적어보자.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생각을 지지하는 기사만 클릭한다.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만 곁에 둔다. 반대 의견을 만나면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논파할 구실부터 찾는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눈앞에 왔을 때, 나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증거를 의심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기사를 골라 읽는 것은 검열이다. 같은 말 하는 사람만 곁에 두는 것은 아부하는 신하들로 궁정을 채우는 일이다. 반대 증거를 의심하는 것은 개표 조작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결코 폐기하지 않는 것은 종신 집권이다.

폭군이 궁정에서 하는 짓을, 나는 매일 내 머릿속에서 하고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같은 고장이 같은 순서로 일어나는 동일한 구조다. 위쪽에서 귀납이 부패하고(확증편향), 아래쪽에서 가추가 봉쇄된다(인지부조화 회피). 나라가 망하는 회로와 사람이 늙는 회로는 같다. 나이가 든다고 어리석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검열하기 시작할 때 어리석어진다.

나. 마음의 독재는 정치의 독재보다 깨기 어렵다

여기에 잔인한 비대칭이 하나 있다.

정치에서는 통치자와 국민이 다른 사람이다. 왕을 끌어내려도 나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통치자와 국민이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틀렸다"는 문장은 곧장 "내가 못났다"로 번역된다. 가설의 폐기가 자아의 처형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생각을 고치지 않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다. 고치는 일이 죽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념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사실 자기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우리는 논리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존엄을 방어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포퍼의 문장을 다시 꺼내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무혈(無血) 교체였다. 그것이 마음에 그대로 이식된다.


성숙한 사고란, 자아의 유혈 없이 가설을 교체할 수 있는 상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가설과 자아를 떼어놓는 것. 내 신념을 "나"가 아니라 내가 잠시 채택한 집권 가설로 격하시키는 것. 그러면 폐기는 자살이 아니라 정권 교체가 된다. 그 생각은 죽은 게 아니라 임기가 끝난 것뿐이다.

내 마음에 헌정질서를 세우는 법

가설과 자아가 분리되는 순간, 나머지 제도는 저절로 따라온다. 정치가 수천 년에 걸쳐 발명한 장치들을, 우리는 머릿속에 그대로 옮겨 지을 수 있다.

삼권분립. 가설을 세우는 나(가추),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나(연역), 현실과 대조하는 나(귀납)를 분리한다. 한 인격이 세 역할을 겸직하면 그것이 곧 독재다. 자기 답안을 자기가 채점하는 시험은 언제나 만점이다.

야당. 내 주장의 가장 강한 반대편을, 내가 직접, 최선을 다해 세운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이기지 말고, 상대의 논리를 상대보다 더 잘 만들어놓고 싸운다. 야당이 없는 마음은 만장일치를 얻고 그것을 진리로 착각한다.

언론의 자유. 듣기 싫은 정보를 검열하지 않는다. 나를 아프게 하는 데이터가, 내가 가진 유일한 오류신호다. 그것을 지우면 나는 눈을 감고 운전하는 것이다.

임기. 신념에 유효기간을 준다. "이 생각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재검토했는가." 10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견고한 진리이거나 10년째 개표를 안 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관보(官報). 기록한다. 내가 언제 무엇을 예측했는지 적어두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고 기억을 조작한다. 글쓰기가 사고의 도구인 이유가 여기 있다. 글은 내 마음의 관보이자 감사기구다. 적어놓은 문장만이 나를 반증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어렵다.

오래 붙든 신념을 놓을 때의 매몰비용, 공언했던 것을 철회할 때의 체면, "이것이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공백. 이것은 진짜다. 그런데, 이것도 매우 강하다. 그래서 여전히 내려오지 못한다.

진짜 독재자를 보자. 그가 물러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진짜 법정이고 진짜 감옥이다. 재산은 몰수되고, 이름은 매장되고, 가족까지 끌려간다. 그에게 퇴진은 자살에 가까운 선택이다. 우리는 그를 비난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의 계산은 합리적이다. 버티는 편이 이득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버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내 생각 하나를 바꾼다고 나를 기다리는 법정은 없다. 감옥도 없다. 재산을 잃지도, 거리로 끌려나가지도 않는다. 내가 어제의 신념을 오늘 내려놓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버틴다. 폭군보다 잃을 것이 훨씬 적으면서, 폭군만큼 완강하게.

헐어야 할 벽은 두 개다.

첫째, 매몰비용. "이 생각에 10년을 바쳤는데 어떻게 버리나." 그러나 지나간 투자는 앞으로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미 지불했고, 회수되지 않으며, 어느 쪽을 택하든 똑같이 사라진 돈이다. 여기서 프레임을 뒤집어야 한다.

"10년을 버렸다"가 아니라 "10년 만에 알아냈다."

그 10년을 살지 않았다면 이것이 틀렸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오류의 발견은 그 10년이 만들어낸 산출물이다. 물리학자가 10년에 걸쳐 어떤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면, 그것은 10년의 낭비가 아니라 10년의 업적이다. 폐기는 손실의 확정이 아니라 성과의 수확이다.

그리고, 우리가 늘 빼먹는 계산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고치는 비용만 계산하고 안 고치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폭군도 똑같다. 물러날 때의 위험만 보고, 버티다가 결국 나라와 함께 무너지는 위험은 보지 못한다. 차우셰스쿠가 그랬다. 끝까지 놓지 않은 자는 결국 더 나쁘게 잃는다.

마음도 같다. 고치지 않은 신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데리고 함께 낡는다.

고치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안 고치면 썩는다.

둘째, 정체성. 이쪽이 훨씬 깊다. "이 생각을 버리면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사람은 얼어붙는다. 논리로는 뚫리지 않는다. 정체성의 정의 자체를 갈아야 한다.

나는 무엇으로 나인가.

내용으로 나를 정의하면 "나는 X를 믿는 사람이다". 가설이 죽을 때 내가 죽는다. 정권과 국가가 붙어버린 것이다. 정권 교체가 곧 나라의 멸망이 된다. 왕이 곧 나라라는 것, 그것이 독재의 정의다.

방법으로 나를 정의하면 "나는 틀린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가설이 죽어도 나는 산다. 아니, 오히려 가설을 죽이는 그 행위가 나를 나답게 만든다. 진리를 좇는 사람이 틀린 것을 버리는 일은 정체성의 배신이 아니라 정체성의 실현이다.

나는 X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X가 틀리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 한 줄이 성립하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버리는 행위가 곧 나의 증명이 된다. 상실이 확인으로 바뀐다.


여기서 잠깐 내 얘기를 해본다. 사실 나도 그랬다. 알고도 15년 걸렸다.

나는 오래 변호사였다. 그리고 변호사가 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알고도 15년을 더 그 안에 있었다.

정직하게 말한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때를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없었다. 생업이 있었고 사건이 있었다. 하루를 버티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나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벗어날 힘을 그 폭정이 다 가져가고 있었다.

이것이 폭정이 오래가는 진짜 이유다. 국민이 몰라서가 아니다. 다들 안다. 그런데 먹고사느라 광장에 나갈 여력이 없다. 폭정은 사람을 속일 필요가 없다. 지치게 하면 된다. 나는 내 안의 독재자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시달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15년 동안 광장에 나가지 못했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내가 가진 것은 사고법과 글쓰기였고, 그것을 조금씩 팠다. 사고법을 연구했고, 글쓰기를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연역과 유추라는 두 개의 뼈대를 만났고, 지식을 구조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장 쓸 데는 없었다. 다만 언젠가 자산이 되리라 생각했다. 2018년, 나는 법률 바깥의 첫 책을 냈다.

그리고 AI 시대가 왔다. 사고법과 지식구조화가 갑자기 값을 갖기 시작했고, 개인이 갖춰야 할 필수자산이 되어 나의 사고법 + 지식구조화 + AI가 엄청난 증폭기가 되었다. 그 결과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준비노력 덕에 증폭의 속도는 남들보다 훨씬 크다.

내가 한 일은 하나뿐이다. 기존 나의 독재(변호사)에만 집착하지 않고, 가설(다른 업)을 세우고 준비했다는 점.

그러니 그 15년을 나는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몰라서 헤맨 시간이 아니라, 다음 정권의 강령을 쓴 시간이었다. 준비 없는 정권교체는 혼란만 낳는다. 야당이 준비해야 할 것은 다음 공약이 아니라, 어떤 정국이 와도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이다.

지금 나는 변호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단독집권을 연립정부로 바꾸었을 뿐이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직업이 아니라, "그것만이 전부"라는 문장 하나였다.

그리고 이 15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 아까 다섯 가지 제도로는 부족하다고 했던 그것이다.

오류수정에는 시간이 든다. 앉아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배우고, 실패를 감당할 여력이 있어야 한다. 그 여력이 없는 사람은 알아도 고치지 못한다. 하루 열네 시간 일하는 사람에게 "네 대전제를 재검토하라"고 말하는 것은, 굶는 사람에게 장기투자를 권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마음의 헌법에는 조항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

삼권분립, 야당, 언론의 자유, 임기, 관보. 그리고 예산.


생각을 고칠 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마음의 예산이다.
그 예산이 없으면 헌법은 종이에 불과하다. 선거를 치를 돈이 없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듯이. 자유는 여가 위에서만 자란다.



마지막으로 하나. "내 안의 독재자를 깨자"는 말을 끝까지 밀면 위험한 지점에 닿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마음,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하는 마음. 그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라 무정부다.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헌법 아래에서 통치자가 교체되는 상태다. 마음도 같다. 바꾸지 않는 층과 바꾸는 층이 나뉘어야 한다. 가치와 원칙은 헌법이고, 사실판단과 전략은 법률과 정책이다. 정책은 자주 바꾸되 헌법은 함부로 흔들지 않는다.

내가 착각했던 것이 바로 이 층위였다. 나는 처음에는 "변호사"를 헌법이라 믿었다. 알고 보니 법률이었다. 개정 불가라 여겼던 조항이, 사실은 언제든 고칠 수 있는 조항이었다. 마음의 독재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정책을 헌법으로 착각하고 성역으로 만드는 것.

이 구분이 없으면 우리는 독재자가 되거나 표류자가 된다. 그 나라의 유일한 국민은 나다. 즉 내가 피해자가 된다.



3. 나가며

정리하자.

독재가 망하는 것은 지도자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틀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이기는 것은 다수가 현명해서가 아니라, 틀린 가설을 피 흘리지 않고 갈아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칙은 광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내 나라의 유일한 집권자이고, 동시에 유일한 국민이며, 유일한 언론이다. 내가 듣기 싫은 사실을 지울 때 나는 검열관이 되고, 내 생각을 고칠 수 없을 때 나는 폭군이 된다. 그리고 그 폭정 아래 사는 유일한 국민은, 나다.

가추가 살아 있는 마음만이 배운다. 오류신호가 도달하는 마음만이 자란다.

그러니 세상의 독재를 말하기 전에, 내 안의 독재자부터 퇴위시켜야 한다. 다만 그를 감옥에 보내지는 마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정권은 조용히 바뀐다. 광장에 피가 흐르지 않고, 전임자는 끌려가지 않으며,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평소처럼 출근한다. 그 무덤덤함이야말로 성숙한 체제의 표식이다.

당신의 마음도 그래야 한다. 어느 날 당신은 오래 믿었던 것을 내려놓을 것이고, 잠시 허전할 것이고, 그리고 저녁을 먹을 것이다.

내려오는 자를 벌하지 마라. 그는 당신이었고, 그 시절 최선을 다했다. 다만 임기가 끝났을 뿐이다.

그것은 자아를 죽이는 일이 아니다. 자아를 생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변호사 이진화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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