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2
[변호사 칼럼] 이제 행운은 오는 것이 아니라 파내는 것이다 - 어디를 팔지는 구조가 알려준다
150여 년 전, 파스퇴르는 한 강연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관찰의 영역에서 우연은 준비된 정신에게만 미소 짓는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이후 수없이 인용되었다. 그런데 정작 파스퇴르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준비된 정신이란 무엇으로 준비되어 있으며, 그 준비는 대체 어떤 원리로 우연을 행운으로 바꾸는가. 격언은 결론만 있고 메커니즘이 비어 있었다.
이 글은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다. 그리고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렇다. 행운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를 갖춘 사람이 파내는 광물이다. 오는 것이 아니라 파내는 것이다.
1막 - 기다리는 행운
우리가 흔히 "운"이라 부르는 것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사실 세 가지가 곱해진 결과다.
행운 = 계기의 발생 × 계기의 인식 × 축적
세 요소는 지위가 전혀 다르다. 첫째, 계기의 발생은 통제할 수 없다. 세상에 균등하게 뿌려지는 확률적 사건이다. 셋째, 축적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우리가 노력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둘째, 계기의 인식은 그 중간에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인식이야말로 노력의 질을 가르는 열쇠다.
여기서 곱셈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이다. 덧셈이라면 하나가 모자라도 나머지로 벌충된다. 그러나 곱셈에서는 셋 중 하나만 0이어도 전체가 0이 된다. 아무리 대단한 계기가 찾아와도 축적이 비어 있으면 결과는 여전히 0이다.
플레밍의 페니실린이 이 구조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흔히 곰팡이가 우연히 날아든 행운의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배양접시가 곰팡이에 오염되는 일은 당시 세균학자 수백 명이 일상적으로 겪던 사고였다. 대부분은 "망쳤다"며 접시를 버렸다. 오직 플레밍만이 곰팡이 둘레에서 세균이 녹아 사라진 고리를 보고 손을 멈췄다. 같은 계기가 수백 명에게 왔지만, 축적과 인식을 갖춘 단 한 사람에게만 그것이 행운이 되었다.
그러니 행운이란 균등하게 뿌려진 계기 중에서, 준비된 자만이 회수해 가는 몫이다. 여기까지가 파스퇴르가 말한 지점이다. 이것을 나는 행운의 첫 번째 단계, 기다리는 행운이라 부른다.
2막 - 불러오는 행운
그런데 준비된 자에게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남들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갈 사소한 일들이, 유독 그에게만 자꾸 계기가 되어 준다. 밖에서 보면 "저 사람은 운이 참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문턱을 낮추는 축적 - 과포화의 원리
소금을 물에 계속 녹이면 어느 순간 더는 녹지 않는 포화점에 이른다. 그런데 온도를 조절해 그 한계를 넘겨 녹인 과포화 용액은 겉보기엔 그냥 맑은 물이다. 하지만 여기에 먼지 한 톨만 떨어뜨려도, 그 순간 용액 전체가 순식간에 결정으로 자라난다. 반대로 묽은 용액에는 아무리 훌륭한 결정 씨앗을 넣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도 똑같다. 축적이 임계점에 가까울수록,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의 문턱이 낮아진다. 묽은 사람에게는 대단한 사건이 와도 무반응이지만, 과포화된 사람에게는 스치는 대화 한마디, 우연히 눈에 든 문장 하나도 결정핵이 된다. 계기가 많아진 것이 아니다. 계기로 작동하는 문턱이 낮아진 것이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이것이 "운이 좋다"로 보인다.
표면적을 넓히는 축적 - 동형성의 렌즈
두 번째 메커니즘은 더 흥미롭다. 같은 양을 축적하더라도, 사실 단위로 쌓은 사람과 원리 단위로 압축해 쌓은 사람은 전혀 다른 눈을 갖게 된다. 원리로 쌓은 사람은 이질적인 분야의 사건에서도 구조가 같으면 곧바로 계기를 알아본다. 이른바 동형성의 렌즈다.
뉴턴의 사과가 정확히 이 사례다.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은 인류 전원이 목격해 온 일상이다. 그러나 역학을 원리 수준까지 축적한 뉴턴에게만, 그 낙하가 "그렇다면 달도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사실 단위로 축적한 사람의 시야는 자기 분야 안에 갇힌다. 반면 구조 단위로 축적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분야가 계기의 공급원이 된다.
결국 행운의 표면적을 결정하는 것은 축적의 양이 아니라 축적의 형식이다. 무엇을 얼마나 쌓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구조로 쌓았느냐가 관건이다. 이것이 행운의 두 번째 단계, 불러오는 행운이다.
3막 - 찾아나서는 행운
여기까지도 행운은 여전히 바깥에서 오는 것을 전제한다. 문턱을 낮추고 표면적을 넓혀 놓았을 뿐, 계기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준비가 무르익은 사람은 마지막 도약을 한다. 기다림을 멈추고, 계기가 있을 곳으로 직접 파 들어간다.
산업 현장의 결정공학자들은 자연히 결정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과포화 용액에 씨앗 결정을 직접 넣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형태로 결정화를 일으킨다. 인공강우도 같은 원리다. 과포화된 구름에 미세 입자를 뿌려 비를 찾아가 내리게 한다.
이 장면이 알려주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씨앗을 넣는 데에도 과포화가 먼저다. 묽은 용액에 씨앗을 아무리 던져도 결정은 자라지 않는다. 즉 이 세 번째 단계는 축적을 건너뛰는 지름길이 아니라, 두터운 축적 위에서만 작동하는 기술이다. 축적 없이 계기만 찾아다니는 것은, 묽은 용액에 씨앗을 던지는 헛수고일 뿐이다.
둘째, 무엇을 넣어야 할지는 알 수 있다. 결정공학자는 어떤 특정 입자가 핵이 될지는 몰라도, 어떤 종류의 입자가 핵이 되는지는 안다. 그래서 그 종류를 넣는다. 여기에 오래된 역설의 해답이 있다. 계기의 내용은 예측할 수 없지만, 계기의 형식은 예측할 수 있다.
(1) 구멍의 모양이 열쇠의 모양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지식의 세계에서 "필요한 계기의 형식"을 어떻게 아는가.
귀납과 연역으로 쌓은 축적이 임계에 다다르면, 지식의 구조에 빈자리가 드러난다. 설명되지 않는 예외,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원리, 닮은 듯한데 어딘가 어긋나는 틈. 이 틈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계기의 음각(陰刻)이다. 구멍의 모양을 알면 열쇠의 모양을 아는 것이다.
그다음 순서로 사고가 작동한다. 번뜩이는 추측이 그 틈을 메울 원리의 형태를 그려 보고, 동형성의 렌즈가 "이런 구조라면 이미 풀린 버전이 존재할 법한 이질적 분야"를 지목한다. 이 구조라면 생물학에, 재료과학에, 어쩌면 음악에 이미 답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 그 분야로 직접 탐사를 떠난다. 이것이 계기를 찾아나서는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이 탐사는 특정한 계기를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계기의 밀도가 높은 지대를 골라 줄 뿐이다. 금광 탐사와 같다. 지질학은 금이 정확히 어디 묻혔는지 짚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지층에 있을 확률이 높은지는 알려준다. 그래서 노련한 탐사자는 아무 데나 파지 않고 그 지층만 판다.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무작위로 파는 사람과는 발견율이 자릿수 단위로 갈린다. 행운을 파낸다는 말은 정확히 이 뜻이다. 행운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운의 확률 지형을 읽고 가장 두꺼운 광맥을 파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다시 보면 뉴턴의 사과도 달리 읽힌다. 그는 이미 하늘의 역학과 땅의 역학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틈을 품고 있었고, 그 틈의 모양에 맞는 열쇠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사과는 우연히 그에게 온 것이 아니다. 수색하던 자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이것이 행운의 세 번째 단계, 찾아나서는 행운이다.
(2) 왜 하필 "이제"인가 - 굴착기의 시대
그런데 이 세 번째 단계에는 오랫동안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었다. 탐사의 비용이다. 다른 분야에 답이 묻혀 있으리라 짐작해도, 그 분야를 새로 배우지 않고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뉴턴급의 지성조차 자신이 깊이 아는 몇 개의 영역만을 뒤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기를 찾아나서는 일은 원리적으로는 가능해도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AI가 무너뜨린 것이 정확히 이 장벽이다. 이제는 틈의 모양을 언어로 기술하기만 하면, AI가 생물학에서 재료과학까지, 음악에서 법학까지 모든 분야를 횡단하며 닮은 구조의 후보들을 몇 분 만에 물어다 준다. 평생 걸리던 도메인 횡단이 대화 몇 번으로 압축된 것이다. 곡괭이로 파던 광맥을 굴착기로 파게 되었다. 제목의 "이제"는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성급한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굴착기가 생겼으니 이제 축적은 필요 없어졌는가. 정반대다. 파는 비용이 무너지면, 가치는 파는 일의 앞과 뒤로 이동한다. 앞에는 어디를 팔지 아는 일이 있다. AI에게 무엇을 찾으라고 말하려면 구멍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데, 구멍은 축적이 임계에 이른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뒤에는 골라내는 일이 있다. AI가 물어오는 후보 중에는 겉만 닮은 가짜 동형이 섞여 있어서, 뼈대까지 같은 진짜 동형을 가려내는 검증은 여전히 사람의 축적이 감당한다. 묽은 사람에게 굴착기는 아무 데나 빨리 파는 기계일 뿐이다.
굴착기의 시대에 지질학은 덜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해진다. 누구나 빨리 팔 수 있게 되었기에, 어디를 팔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진다.
4막 파낸 자리의 깊이 - 골짜기와 웅덩이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행운을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로 잰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높이가 아니라, 그 높이에 선 자리가 얼마나 깊은가다.
지식의 상태를 골짜기와 언덕이 있는 지형 위에 놓인 공이라고 상상해 보자. 축적으로 쌓아 올린 지식은 깊고 넓은 골짜기와 같다. 밖에서 충격이 와 공이 흔들려도, 벽을 타고 다시 굴러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자리를 무너뜨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하고, 설령 넘어간다 해도 바로 옆의 또 다른 깊은 골짜기에 안착한다. 그래서 무너져도 완만한 내리막이며, 회복이 가능하다.
반대로 축적 없이 우연히 오른 지식은 언덕 꼭대기의 얕은 웅덩이와 같다. 이른바 준안정 상태다. 겉보기에는 높은 곳에 있어 안정해 보이지만, 살짝만 건드려도 웅덩이를 벗어나 언덕 아래 바닥까지 곧장 굴러떨어진다. 과냉각된 물이 톡 건드리는 순간 순식간에 통째로 얼어붙는 것과 같다. 경고도, 중간 단계도 없이 전부 아니면 전무다.
두 사람이 같은 높이에 서 있어도 운명이 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연한 계기는 높이만 벌어 줄 뿐 깊이를 벌어 주지 못한다. 오직 축적만이 높이를 버는 동시에 그 발밑을 파 내려가 골짜기를 깊게 만든다. 그러니 파낸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겹쳐 있다. 계기가 묻힌 지층을 파 들어가는 일이자, 딛고 선 자리를 무너지지 않는 골짜기로 파 내려가는 일이다.
5막 - 마치며
행운을 대하는 태도는 세 단계로 자란다. 처음에는 계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다음에는 준비를 갖추어 계기를 불러오며, 마침내는 계기가 묻힌 곳을 예측해 직접 파 들어간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대기에서 수색으로.
그리고 이 세 단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축적의 진짜 기능은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발밑을 깊게 파는 것이다. 높이는 계기가 주지만, 깊이는 오직 축적만 준다.
그러니 운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지 말라. 굴착기는 이미 모두의 손에 쥐어졌고, 남은 문제는 어디를 팔지 아는 눈이다. 파스퇴르가 비워 둔 자리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
행운은 오는 것이 아니라 파내는 것이다.
축적은 발밑을 깊게 하고, 사고의 구조는 어디를 팔지 알려주고, AI는 굴착기가 된다.
축적은 발밑을 깊게 하고, 사고의 구조는 어디를 팔지 알려주고, AI는 굴착기가 된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