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칼럼] 확신의 시장에서, 진실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한 부모가 감기 걸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옮겨 다닌다. 첫 의사는 신중했다. "바이러스성일 가능성이 높고, 며칠 푹 쉬면 자연 회복됩니다. 약은 증상 완화 정도입니다."
두 번째 의사는 단호했다. "이 약 드시면 금방 나아요." 부모는 두 번째 의사를 신뢰한다. 약이 더 잘 들어서가 아니다. 들을 때 마음이 편해서다.
이 한 장면 안에 인간 사회의 오랜 모순이 응축되어 있다.
정직한 전문가는 자기 사고에 반증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 가능성이 있다", "조건에 따라 다르다"는 표현을 쓴다. 이건 사고의 정밀함을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청자에게는 "이 사람은 잘 모른다"로 디코딩된다.
반대로 사기꾼은 자기 사고에 검증 회로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단정적이다. 그 단정이 청자에게는 "이 사람은 잘 안다"로 번역되어 권위로 작동한다. 사고의 풍부함이 무능으로, 사고의 부재가 권위로 보이는 역변환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자기 검증 회로가 있는 진실한 사람 vs 자기 검증 회로가 없는 사기꾼
때론, 사기꾼이 능력자로 취급받는 것이고, 그게 자주 있다는 것이다.
이 비대칭성은 우연한 결함이 아니다.
인간 두뇌는 진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생물학적 스트레스로 처리하도록 빚어졌다. 풀숲에 호랑이가 있을 확률을 정밀하게 계산한 조상은, "있다"라고 단언하고 도망친 조상보다 일찍 죽었다. 정밀한 확률 계산은 진화적 사치였고, 단정적 판단이 생존 친화적이었다. 그 결과 우리 뇌는 확답에 도파민을 느끼고, "~일 수도 있다"에는 본능적 불편함을 느끼도록 회로화되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성의 문제
문제는 이 비대칭성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같은 인지 회로를 공유하는 한, 위기가 부재한 번영기에는 확답하는 자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다. 정직한 전문가는 주변화되고, 단정적 이데올로그가 의사결정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누적된 오판이 위기를 만들고, 위기 속에서 확답들이 실제로 검증당하면서 사기꾼이 일시적으로 도태된다.
회복기에 진실 추구자가 다시 호명되지만, 다시 번영기로 들어서면 같은 사이클이 반복된다. 흥망성쇠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인지 시장의 구조적 결과다.
이렇게 보니, 웬지 우리 정치판을 보는 느낌이긴 하다. 진보가 안정판을 깔아두면, 보수가 무모한 성장을 얘기하면서 말어 먹고, 다시 진보가 이를 수습하면, 다시 보수가 말어먹고...
인간에게 완전한 안정 성장은 불가능하다. 다만 흥망의 주기와 진폭은 조절할 수 있다. 인류가 발명한 가장 정교한 사회적 장치들 학문, 언론, 사법, 의회는 사실 모두 집단적 자기반증 회로다. 한 사람의 단정이 아무리 강력해도 다른 사람이 반박할 수 있는 구조. 진실의 자연 패배를 인공적으로 보정하는 시스템.
변호사로 일하는 나는 매일 이 시스템의 한 노드에서 일한다. 법정은 인간 사회의 자연 상태에서는 사기꾼이 이기지만, 인공 환경에서는 진실 추구자가 (적어도 더 자주) 이길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이 인공 환경이 약해지면 사회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진실 추구자에게는 본질적 외로움이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시장에서 합리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의 외로움. 자기 정직함이 사회적 비용으로 청구되는 경험. 정밀하게 말할수록 신뢰를 잃는 역설. 그러나 이 외로움이야말로 그가 인지 시장의 비대칭성에 순응하지 않는 위치에 서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사기꾼은 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흥망성쇠는 사회의 질병이 아니라 호흡이다. 들숨만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호흡의 깊이와 리듬은 우리가 어떤 회로를 제도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학문의 자유, 언론의 독립, 사법의 견제, 이 인공 회로들이 강건한 사회는 발작적 호흡을 면한다. 약해진 사회는 거친 호흡을 거듭한다.
확답을 사랑하는 시장에서, 신중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문명이 호흡을 잃지 않는 마지막 이유일지 모른다. 그들의 외로움이 사회 전체의 폐활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