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변호사 칼럼] 마이클잭슨 무대에서 찾은 선거의 원리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본 적이 있는가. 그가 한동안 미동도 없이 멈춰 서 있기만 해도 수만 명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비트가 터지는 순간, 객석 전체가 통제 불능으로 들뜬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장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후보가 연단에 오르고, 한마디에 광장이 들끓는 선거 유세장. 무대와 광장은 닮았다. 둘 다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뜸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공식이 있다.
뇌는 다음 박자를 예측한다
비밀은 우리 뇌에 있다. 뇌는 끊임없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기계다. 음악을 들으면 다음 박자가 언제 올지 미리 모델을 세운다. 이때 박자가 예측대로만 또박또박 오면? 지루하다. 반대로 박자가 완전히 제멋대로면? 뇌의 예측 모델이 무너져 불쾌해진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것은 그 사이다. 예측을 살짝 배반하는 엇박, 음악에서 말하는 신코페이션. 예측이 살짝 어긋났다가 해소되는 순간 뇌는 도파민이라는 보상을 내놓는다. 그래서 펑크와 힙합의 그 끈적한 리듬에 우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인다. 너무 단순하지도,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황금 지점. 이것이 '그루브'의 정체다.
정치가 파는 것은 '손에 닿을 듯한 이상향'이다.
이제 광장으로 가보자. 정치도 정확히 같은 공식 위에 서 있다.
선거에서 후보가 파는 상품은 비전이다. 그런데 비전이라고 다 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황금 지점이 있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현상 유지의 메시지는, 음악으로 치면 예측이 전혀 어긋나지 않는 밋밋한 박자다. 새로움이 없으니 가슴이 뛰지 않는다. 반대로 완벽한 유토피아,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약속은 예측 모델 자체를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어차피 안 될 일"이라며 냉소한다.
표를 움직이는 것은 그 사이, 바로 손에 닿을 듯한 약간의 이상향이다. 현실을 살짝 넘어서지만 충분히 도달할 것 같은 비전. 이 적정한 거리가 사람을 들뜨게 하고, 그 들뜸이 사람을 투표장으로 끌어낸다. 음악에서 몸을 흔들어 엇박을 메우듯, 정치에서는 한 표를 던져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원리가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든 "되찾아야 할 어제"를 호소하든, 구조는 똑같다. 둘 다 현 상태를 넘어서는, 그러나 닿을 듯한 비전이다. 일찍이 토크빌이 간파했듯, 사람들이 가장 들끓는 순간은 상황이 최악일 때가 아니라 나아지기 시작할 때다. 이상이 비로소 손에 닿을 듯해질 때, 현실과의 간극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날의 검이다
여기서 멈추면 위험하다. 이 원리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같은 리듬 공식이 위대한 명곡에도, 귀를 잠깐 홀리는 싸구려 자극에도 똑같이 쓰이듯, '손에 닿을 듯한 이상향'이라는 동원 장치도 정의로운 개혁의 깃발이 되기도 하고 위험한 선동의 미끼가 되기도 한다. 차이는 엔진에 있지 않다. 그 비전이 진실한가, 약속이 실체를 가졌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아는 일은 후보에게만 쓸모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권자에게 더 절실하다.
가슴이 뛸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비전의 내용에 설득된 것인가, 아니면 잘 설계된 그루브에 올라탄 것인가.
가슴이 뛸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비전의 내용에 설득된 것인가, 아니면 잘 설계된 그루브에 올라탄 것인가.
결국 하나의 원리가 세 개의 세계를 관통한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음악, 사람을 결집시키는 정치, 그리고 사람을 무릎 치게 하는 좋은 발상까지. 좋은 유추가 우리를 짜릿하게 하는 것도 익숙한 구조 위에 닿을 듯한 새로움이 얹힐 때다. 무대도 광장도 연구실도, 모두 익숙함 위에 적정한 새로움을 얹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표는 머리가 아니라 들뜬 가슴이 던진다. 다만 현명한 유권자는 그 들뜸의 정체를 안다. 마이클 잭슨이 무대 위에서 매일 증명하던 그 비밀을 말이다.
법무법인 한백 변호사 이진화
